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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2: 46) [본격 학원소설] 스푼펜
1
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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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시간 :
16-08-18 06:59
ID :
magVup3Y9jkco
본문
내가 만화 그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웃음을 위해서 그렸던 것 같다.
처음에는 병약했던 누나를 위해 그렸었다, 누나가 내 첫번째 팬이 되어주자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는 것이 좋았다. 처음엔 그것뿐이었다.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았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기뻐해주는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부탁하는 사람이 원하는 스토리를 잘 들어주어서
칸을 그리고 배경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는게 좋아졌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한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가 말했다.
매일 남을 위한 그림을 그리잖아. 정작 너를 위한 그림은 없는거야?
넌 그 자체로도 좋은거야? 단지 누군가의 미소를 보는 기쁨으로?
네가 정말로 원하는 만화는 없는거야? 네가 무슨 기계야? 정작 네 취향은 없어?
뒤돌아서 생각해봐. 네 주위에 모두가 너를 이용하고 있어. 남의 말만 듣고 똑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다고!

당장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리고 싶은 것. 이제까지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그런 갈등의 이야기다.
2
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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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Vup3Y9jkco

"잘 되어가고 있어?"

온리전을 앞둘 때마다 물어보는 말이다.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다. 글은 누나. 그림은 나. 콘티와 먹칠과 톤 붙이기는 누나. 나머지는 나. 4년 내내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 남매는 둘이서 하나이자 하나이면서 둘로서 이런 작업을 반복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이번 회지의 작품은 [HQ]. 거기에서 '영산이X양달이'가 주제. 캐릭 사이에 X자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커플링이 내용이다. BL. 보이즈 러브. 남자끼리 사랑을 여성의 입장에서 표현하는 장르.

16페이지에 흑백을 그리고 있지만 전부 손으로 그리고 있다. 늦은 시간에 자정까지 지나면서 작업 분량을 완성하고 있는 나에 비해서, 누나는 내가 준 일감을 마치지 못하고 마지막 페이지의 콘티를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골몰하고 있다. 누나가 콘티를 끝내지 못하면 이날도 밤샘 확정이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일찍일찍 했으면 좋았잖아."
"어쩔 수 없잖아. 스토리라는 게 나와라 얍!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앉아서 게임만 했던 주제에 그런 말이 나와?"
"으...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어차피 라스트니까 훈훈하게 쓰면 되잖아. 순애물이 컨셉이라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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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Vup3Y9jkco

누나는 고개를 흔든다. 생각해보면 누나가 그렇게 나태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다. 생각하는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모르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각에 가열되는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서 다른 일에 골몰하다 힌트를 얻는게 누나의 일상이다. 그 다른 일이란 게임일 수도 있고 만화일 수도 있고 공부일수도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관심이 없는 나와는 정반대 타입이다.

"반전! 마지막에 반전할꺼야. 다음 온리전에 다음 편을 쓰기 위해서. 우리들은 잘 팔리는 존잘이니까 그래도 되는거야.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이 누나가 끝~내주는 피니쉬를 생각해볼 테니까."
"밤샘 확정이네. 톤이나 붙여줘. 난 이걸로 오시마이."

마지막에서 바로 앞 페이지까지 작업을 끝내고 자리에 일어선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잘 시간이지만 마감이 코앞인데다가 지금 자면 일어나지 못한다. 이 시간의 간극을 채우는 건 역시 그림밖에 없다. 그릴 거리야 많다. 밖에 풍경일수도 있고 책장에 수없이 꽂혀있는 다른 만화의 모사일 수도 있다. 혹은 지금도 머리를 굴리느나 집중해 있는 누나의 모습일수도 있다. 이번엔 누나를 그려보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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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내 말도 듣지 않고 계속 빈 페이지에다가 자라나라 스토리토리하는 듯한 표정이다. 헝클어진 흑발에서 인상을 지뿌리고 있는게 온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흉하게 보이지 않다. 그 얼굴, 그 얼굴을 지고 있는 손, 그 손 아래에서 새하얀 티셔츠, 티셔츠 속에 가녀린 어깨, 어깨 밑에 자기주장이 강한 가슴, 티셔츠가 헐렁하게 보이는 얇은 허리 등등. 남매사이가 아니었다면 누나를 보고 미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6년 전 과거와 갭부터 생각난다. 그때 누나는 모든 것이 메말랐으니까. 마치 미이라처럼. 그리고 있었던 곳은 이런 원룸이 아니라 병동이다.

내가 어떻게 첫 만화를 그린게 생각난다.

누나가 퇴원하게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백혈병 환자였다. 그것도 말기라서 오늘내일하는 삶이었다. 누나는 초등학교부터 만화 애니에 빠져서 세상의 모든 만화를 볼 때까진 죽을 수 없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누나가 죽을 것 같자 결심이 선건 만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목적은 누나가 빨리 낫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주인공도 누나였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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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스토리를 할지 몰라서 누나가 보던 애니를 보았는데 손이 갔던 건 [두 사람은 프리파라]였다. 누나 나이대인 여자 둘이서 변신을 해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이야기였다. 재미있어서 52화 끝까지 다 보았고 그걸 주제로 연습장을 꽉꽉 채워서 만화를 그렸다. 기본적인 칸 나누기도 몰랐다. 그런 것은 다른 만화를 참고했을 뿐이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누나가 마법소녀로 변신해서 악당들을 물리쳤더니 누나를 백혈병에 걸리게 한 원흉과 영혼의 맞다이를 붙어 끝내 승리하고 백혈병을 극복한 이야기였다.

다 그리기는 한달정도 걸렸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고 초등학생에게 남는 건 시간이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간이 있어도 200페이지도 넘는 연습장을 한달 안에 꽉꽉 채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누나가 오늘내일하는 목숨이었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그렸었기에 가능한 것일까. 날림 공사마냥 그리는 것도 꽤 많았다. 하지만 이것을 보여주자 누나는 집중해서 쭉 읽어보다가, 웃다가, 또 웃다가, 마지막엔 울었다. 그때 했던 말은 그거였다.

"스토리가 엉망진창이잖아. 내가 낫는다는 이야기라니... 현실성이 없잖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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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지은 누나의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그것이 기적의 단초였을까. 현실은 대개 만화처럼 되지 않지만 만화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날 때도 있다. 누나는 살아야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강도 높은 수술을 참아냈으며 백혈병을 완벽히 극복했다. 내가 누나를 살린 것이다. 고작 그림그리는 재주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내가 취미가 누군가를 위할 수 있는 것이구나. 누나가 퇴원한지 1주일 후에 누구보다 건강하게 달리는 모습을 볼 때 전율에 떨었다.

그때 나는 꿈을 꾸었다. 반드시 만화가가 되어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 첫걸음은 부모님을 조르는 일이었다. 만화 교본을 사서 거기에 나오는 포즈를 작은 손에 연필을 쥐고 연습장에 미친듯이 그렸다. 그린 만큼 실력이 당장 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다. 재미있으면 된 것이다.

그런데 특이점은 그 다음에 왔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누나는 병 때문에 엇나간 중학교 생활을 무사히 졸업하고 겨우 제 나이대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양 학교간에 입학식은 삼일절 바로 다음 날에 치루어졌고 그때 누나는 산더미만한 만화책을 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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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만화가가 될 생각 없니?"

라고. 엉뚱한 소리였다. 그때 내가 했던 짓거리가 바로 눈앞에 유리잔을 두고 데셍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일이었다. 동인. 아마추어들의 세계.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기 나름대로 창작물을 보고 즐기는 공간. 누나가 고등학교에 들자마자 사귀게 된 친구 중에 몇 명이 그쪽 사람이었고, 누나가 투병생활을 했던 중에 작품을 냈던 친구가 더러 있었다고 했다. 누나도 거기에 참여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누나에겐 그림에 대한 열정은 많았지만 재능은 처참하다. 지금도 누나에게 그림을 가르치면 그 결과는 코스믹 호러를 느끼게 할 혐짤뿐이다. 하지만 그 대신에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잘 풀어낼 줄 안다. 어떤 말이라도 어른보다 조리있게 말할 수 있으며 어떤 주제로도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단박에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다. 읽는 것도 많았으며 아는 것도 많아 성적도 우수하다. 겨우 낙제를 면할 나완 차원이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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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특이한 점은 그 당시부터 지금도 열정이 BL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성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보면서 사랑은 분명 남자와 여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게 보통이다. 남자끼리 사귄다는건 처음 들어보면 이해하지도 못하고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춘기였다. 성에 눈을 뜰 나이. 퇴원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부피가 늘어나는 누나의 가슴에 몇번이나 심장이 두근거렸던가.

"아 또 가슴을 보네. 변태. 하지만 괜찮아. 자연스러운 거니까.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들어줘. 남자가 여자를 보고 보고 두근거리는 만큼 여자도 남자를 보고 두근거려. 그것이 가상의 남자일지라도. 그러니까 남자끼리 있는 장면을 보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남캐들, 그 남캐들이 사랑을 하는 장면을. 그렇게 해서 나온게 보이즈 러브라는거야."
"대충 알겠어. 그런데 남자끼리 사랑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전혀! 만명의 인간에게 각자 다른 사랑과 다른 상상이 있거든. 만화가가 되기 전에 가장 먼저 배워야 할게 그거야. 그림 밖에 못 그리는 바보는 만화가가 될 수 없어. 내가 가르쳐줄게. 아마 날 도우면 배우게 될거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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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어렸을때부터 항상 내 공부를 도와주었고 지금 고등학생인 나에게도 그러고 있다. 그런 누나가 내가 만화가가 되는 길을 가르쳐준다. 그림은 정말 못그리지만 그런 누나를 신뢰한다. 분명 누나를 도우면 만화가의 길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나는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동인 팀이 바로 "아름드림"이다. 누나의 필명은 아름. 나의 필명은 드림.

우리의 데뷔는 초창기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용돈이 필요없을 만큼 돈이 많이 벌렸다면 이해가 갈까? 처음엔 누나 선배에게 빌린 화구로 그렸었지만 지금은 회지 판 돈으로 충분히 화구를 장만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누나가 대학생이 되었을 땐 19금도 그리게 되었다. 회지는 당연히 잘 팔렸다. 아름드림하면 그쪽 계열에서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더 적을 지경이다.

그동안 배운 것도 많았다. 인체비례 등 배워야 할 것도 많았고 그만큼 그림 실력은 더 늘었다.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남자가 BL을 그리는 것은 여자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 내 정체를 숨겨야 했고, 여캐를 그리는 일도 만화속의 여캐나 누나를 따라서 그리는 일 밖에 없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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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다. 누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고 내 꿈에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불안감이 들곤 한다. 나는 아직도 그림밖에 못 그리는 바보에서 벗어난게 아닐까 하는 일. 이제까지 누나를 도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지만 늘었던 스테이터스는 그림밖에 없다.

"상열아~ 다 되었어!"

아차. 잡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어서 빨리 콘티를 따라 그려야지. 고맙게도 누나는 내가 마친 분량에 톤까지 착실하게 마쳤다. 이제 마지막 페이지 작업만 끝나면 일은 끝난다. 오늘도 정말로 긴 밤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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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7시다. 누나는 벌써 온리전에 나가 집에 없고 탁상엔 정성스럽게 만든 샌드위치가 우유와 함께 있다.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한 뒤에 이빨을 닦고 교복을 입고 나서 등교를 한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사랑초대학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누나가 다녔던 고교이기도 하고 지금 누나가 재학중인 사랑초대학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집에서 자전거로 약 10분 거리. 잠이 부족해서 졸음이 오지만 그래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은 된다. 결국 오전자습 1시간동안 남은 잠을 보충하고 수업을 듣는 수 밖에 없다.

점심시간 되면 항상 찰거머리같이 붙는 녀석이 있다. 고등학교부터 악우가 된 녀석. 반전원이다.

"여어~ 나의 붸~스트 프렌드 주상열! 이번에도 놓치지 않는다고. 제발 만화부에 들어가라. 진짜."
"아 귀찮아. 수학 숙제는 다 해놨어? 검사하다 또 빠따 갈텐데?"
"내가 너인줄 아냐? 미적분따위 몇 페이지가 와도 10분안에 다 풀지. 그러니까 제발 부탁한다. 만화부에 좀 들어와. 너같은 인재가 필요하다니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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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년 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일 시절. 내가 만화부에 들다가 말았던 이유가 있다. 이 학교의 만화부는 남자 만화부인 '엑셀'과 여자 만화부인 '브레이크'가 있다. 브레이크는 만화를 그리지만 엑셀은 만화를 볼 줄만 안다. 만화부라고 해서 꼭 만화를 그리라는건 아니지만 하는 짓은 만화와 애니를 감상하고 거기서 토론하던가 개드립 섹드립 성우드립 등등을 치던가 혹은 프라모델을 조립하거나 보드게임을 하는 것 따위다. 만화를 그리지 않는 만화부는 나에겐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브레이크에 들 수도 없다. 여자 전용이라는 이유도 있고, 자칫 여기에서 만화를 그리다 동인계에서의 내 정체가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래봤자 만화를 그릴 것도 아니잖아? 엑셀은 소비러 전용 부활동이니까."
"이번엔 달라! 브레이크와 내기를 걸었단 말이야. 이번 겨울에 코믹왈도에 나가기로 했거든. 누구 회지가 더 잘 팔릴까 하는 내기를 걸었어."
"만화 그릴 줄 아는 놈이 하나도 없는 애들이 뭘 한다고."
"그러니까 네가 필요하다는거 아니냐. 제발! 친구 하나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그림을 가르쳐 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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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왈도'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동인행사다. 왈도 킴이라는 재미교포가 창설한 회사이기도 한데, 20년 넘게 최대 최고를 놓치지 않고 있다. 나와 누나의 팀인 '아름드림'도 주 활동지가 여기다. 물론 내가 거기서 '드림'이라는 사실은 감추고 있고, 이를 위해서 드림일때의 그림체와 다른 남성향적인 그림체를 개발하고 있긴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런데 거기에서 내기를 걸었다고?

"내기 종류가 뭔데?"
"우리 부가 통합하기로 했는데, 아시다시피 엑셀과 브레이크가 사이가 나쁘잖냐."
"확실히 너네 부에는 답이 없는 변태들이 많지. 그쪽에도 그렇긴 하지만."
"지는 사람이 부를 탈퇴하기로 했단 말이야."
"뭐?"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이 둘은 공존이 불가능할 만큼 대립이 심하다. 취향 차이가 가장 크지만, 브레이크 부원에게 성희롱을 거는 놈도 있으며 그 반대로 엑셀 부원 가지고 BL을 그리는 년도 있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게다가 겨울 지나고 나면 고3이지 않는가? 고3까지 부활동을 하겠다고?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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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Vup3Y9jkco

"에라 질렸다. 니네가 해결해라. 나는 내 그림 그리기도 바쁘다. 그러니 이제까지 그림 안 그리고 뭐했냐? 야. 한달 동안 따라그리기만 잘 해도 웹툰 정돈 만들어. 그것도 못해?"
"주상열!"

갑자기 큰 소리에 갑자기 놀랐다. 재수없는 녀석이긴 해도 웬만해선 진지한 법이 없다. 항상 웃거나 농담하는게 일인 녀석이다. 만화로 치자면 개그 캐릭터. 그런데 그런 녀석이 화난 표정을 지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무섭다. 한마디로, 지금의 반전원은 매우 필사적이다.

"그림으로... 누굴 돕고 싶지 않아?"

쿵.

머리속에서 들려오는 의태어. 그림으로 누굴 돕는다. 내가 드림이란 필명으로 비밀리에 도우던 일이다. 항상 하던 일이다. 생각지 못했다. 그림으로 누굴 돕는 대상은 누나에게만 한정짓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애초에 내 꿈이 내 만화로 남을 도와주겠다는 일이 아니던가? 누군가의 웃음을 위해서. 내가 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하나의 신념이기도 하다. 하마터면 그걸 어길 뻔한 일이다. 내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리고 반진원이라는 인간의 진심을 알겠다. 하지만 낮부끄러워서 녀석의 진지한 눈을 외면한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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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그럼 방과 후에 찾아올게."
"이얏호오오오오오! 무르기 없기다?"
"하아... 대신. 가르치기만 할거다. 알겠지?"
"당근 빠따지!"

언제 그랬다는 듯 평소 모드로 돌아가는 녀석. 한숨밖에 나오지 않다. 남은 반 해동안 무지 바빠지겠다. 잠시 잊었던 귀찮음이 한꺼번에 쏠리는 기분이다. 그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해서 5교시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내준 간단한 미분 문제도 풀지 못하고 빠따 풀스윙으로 5대 맞아서야 정신을 차린다.

여튼 오늘이 토요일이라 시간은 제법 널널하다. 야자도 없는 날이고. 그래서 6교시 지나고 바로 엑셀 부실로 항한다. 그때 길목에서 누군가가 내 앞길을 막는다.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알고 있다. 최미애. 반장이자 브레이크의 회장이기도 한 진성 부녀자.

"반진원의 일을 도와주려고 가는 길이지?"
"아아. 그렇게 되었어."
"10분만 시간 내어줄래? 고백할 게 있어."
"뭐?"
"따라와."

고백이라고? 여자가 꺼내는 고백이라면 백이면 백. 그거이지 않은가. 흉중에 있는 사랑의 감정을 풀어내는 일. 그러니까 그런 고백. 순간 심장이 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것이 멍청한 설레발이라는건 도착해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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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그곳에서 미애가 말하는 한마디가 내 뇌속을 후벼팠다.

"네 정체 알고 있어. 아름드림의 그림 담당. 드림이 네 정체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나 그런 거 몰라."
"다 알고 있어. 나도 동인계에 있는 인간이고 내 언니가 네 누나의 친구야. 나중에 누나에게 물어봐. 나에 대에서 다 알테니까. 최신작이 [HQ]에서 영X양이지? 나는 그 리버스를 선호하지만."
"원하는게 뭔데?"

이것까지 말하니까 더이상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누나와 그 주변인물 말고는 극히 없다. 입이 무거운줄 알았는데 내가 물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최미애를 해꼬지할 수도 없다. 지금 갑은 그녀고 을은 나니까. 수틀리면 내 정체를 까발릴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심한 혼돈이 될까? 애초에 냉정한 아이인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인 줄 생각하지 못한 바다.

"그 일에 손을 떼달라는 부탁은 안 할거야. 너는 그림으로 누구를 돕는 일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거 잘 알고 있으니까. 나랑 같이 봉사활동에서 기억 나? 그때 너는 누구보다도 진지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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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라면 기억한다. 1학년때도 나와 미애는 같은 반이고 근처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했던 일은 벽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도 페인트로. 도합 200m 정도 되는 거리를 그림으로 꽉꽉 채우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애들이 귀차니즘에 빠져서 지쳐 있을 때 나는 꼬박꼬박 그림을 그렸고 결국 자포자기하려던 미애까지 거들게 되었다. 난 그것을 하나의 수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림을 가르쳐달라는 것까진 허락하겠어. 하지만 그놈들의 회지에 네 그림이 한 줄이라도 올려있다면 고발할 거야. 미성년이 수위본 그리는 것까지. 주상열. 너는 계속 우리들의 존잘로 남아줬으면 해."

그녀는 나를 지나치고 딱 한마디만 남긴다.

"배신은 용서하지 않겠어."



===================================== 다음 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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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받을게. 충고나 비판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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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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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만 가르칠 생각이고 그걸로 끝인 일이다. 하지만 무슨 마음인지 무슨 불안진지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잖아. 최미애는 대체 주상열이라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엑셀의 부실로 향했다. 내가 알기로는 20명이 넘는 브레이크에 비해 엑셀은 활동인원이 겨우 7명. 반도 안되는 수치다. 진원이의 말로는 여자에 비해서 남자는 덕후라는 타이틀에 굉장히 부담을 갖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런걸 신경쓰지 않는 내 입장에선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들어와보니 과연 그렇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이 상당히 찌질해보이는 놈들이었다.

학년마다 각각 2명 3명 2명이다. 1학년은 한규식이라고 비쩍 마른 놈, 백현태라고 아주 오토코노코처럼 생긴 놈. 2학년은 반진원을 포함해서 유재훈이라고 엄청 뚱뚱한 놈, 박민성이라고 보통 체격인데 엄청나게 어두워보이는 녀석, 김상재라고 생긴건 잘 생겼는데 중2병 같은 행색을 하는 놈. 3학년 선배 중에 제갈수영이라고 유재훈과 같이 뚱뚱한데 근육질이 붙은 놈과 고덕담이라고 차라리 운동부에 더 잘 어울리는 근육돼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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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일단 소개하자면 이번에 들어오게 된 주상열이라고 합니다. 모두 박수."
"잘 부탁드립니다."

짝. 짝. 짝. 내가 머리를 숙이니까 대충 박수를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제법 진지한 게 구원자를 바라는 눈빛인지 아예 잡아먹을 듯한 눈빛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들에게 내 이름이 만화 잘 그리는 놈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수업시간마다 만화 그리는걸 연습했고 만화와 관련된 봉사활동을 하면서 조금 알려진 것이니까. 아니면 미술시간이나 교내 미술행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거나. 사실 생각해보면, 내 그림에 가장 먼저 감명을 받은 놈은 반진원 그 작자이니까 입김이 들어간 모양이다.

"상열이는 임시 부원으로 여기에서 그림을 가르칠꺼야. 고덕담 선배. 그래도 되는거죠?"
"상관없어. 그림만 잘 그리면 그만이지. 잘 부탁한다."

엑셀의 부장은 진원이지만 아무래도 실세는 덕담 선배가 다 잡은 모양이다. 중학교 때 검도부로 상도 많이 땄지만 고등학교 때 운동을 그만두고 자기 성향이 밀덕후임을 드러냈다고 한다. 사실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프랑스어로 쓰여지 있는 잡지인데 커버에 탱크 사진이 그려져 있는걸 봐선 밀적 잡지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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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얼마나 네 생각을 그림이라는 틀 안에 투영할 수 있는 지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너의 누이가 어둠의 금기로 인해 암흑으로 부패한 여자라고 했다. 그녀의 권속중 하나라 노예처럼 잡일을 하면서 그녀의 친구에게 여러가지 기예를 들었다고 들었다만?"

이 쓸데없이 구구절절한 대사의 주인공은 김상재. 팔에 항상 붕대를 감으면서 내 어둠속에 창룡이 깃들고 있다고 드립치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은 나에게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실제로 '아름드림'은 남덕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름이고 특히 누나가 졸업한 이 학교에선 한번쯤 들어봤을 단어니까. 실제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을 때 '난 그냥 톤이나 붙여주는 역할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넘어가곤 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쳐주기 전에 부원 여러분의 그림을 봤으면 싶습니다. 한번 지금 그리고 싶은 걸 그려줄 수 있겠어요? 30분 주겠습니다."

선배가 있다 보니 대놓고 반말은 못까겠고 사무적인 마인드로 존대말을 쓴다. 일단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전부 연습장을 들고 연필을 끄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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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어이. 그러면 과자 좀 사와라."

수영 선배가 5천원짜리 지폐를 주자 가볍게 두 손으로 받고 매점으로 간다. 아마 이들도 필사적일테니 집중할테고 그러면 굳이 빨리 사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발걸음은 제법 무겁다.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라 누나를 도우는 일에 지장이 생길 수 있는 일일테고 성과가 나쁘면 내가 회지에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미애에게 책을 잡히는 것인가?

이제까지 학교에서 원래 내 그림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기서 보여주는 내 그림은 만화가 아닌 '미술'이거나 만화라도 SD거나 다른 만화를 따라 그려서 짜깁기하는 모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하다. 내 진짜 그림체를 아는 사람은 최미애 하나밖에 없는 건가?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 봐. 분명 과연 몇명이나 자기 정체를 알고 있는지 불안에 떨고 있는 거지?"

깜짝이야. 돌아보니 미애다. 그녀는 매점 식탁에 대놓고 문제집을 놓고 포카리스웨트를 마시고 있다. 여기서 공부하다 잠시 쉬는 건가?

"걱정 마. 이 학교에서 정체를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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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물어보고 싶은 바가 있는데 잘 된 일이다.

"어이 최미애. 대체 왜 이러는거야? 엑셀과 사이가 안 좋은 건 이해가 가고 그럴 짓이 쌍방에 꽤 많은 건 알고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재수없잖아."
"뭐?"

직설적이고도 난폭한 대답에 살짝 흥분한다.

"재수없다고. 만화동아리랍시고 소비질밖에 못하는 등신들인 것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우리들은 남덕의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어. 너 말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대부분 남덕들은 모에물이니 미소녀물이니 해서 로리니 거유니 여성을 대상화하기나 하고 실제 여자를 우습게 보잖아. 지글지글하다고. 잘생기기나 하면 몰라 반 이상은 얼굴도 못 생겼잖아?"
"어이 최미애!"
"뭐?"

고함을 질렀지만 더 이상 언성을 높일 수가 없다. 갑은 미애고 을은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질 건 따져야 하겠다.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인 거 알아? 내가 그리는 것도 그렇고."
"물론 그렇긴 하지."

반론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답이 시원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론의 이유가 되는건 대답을 듣기 직전에 눈치채버린다. 늦은 타이밍이다.

"...아!"
"그러니까 양쪽이 상호 비존중인거야. 이제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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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가는 일이다. 원래 똑같은 수준인 타자들간에 대립이 가장 심한 법이다. 그녀도 그걸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설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시궁창같은 갈등에 내가 얼떨결에 들어간다. 지독하다. 게다가 승부의 무대인 코믹왈도는 완전히 여덕들 천지가 아니던가? 물론 나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단 한번도 동인행사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솔직히 양쪽이 어떻게 되던 난 상관없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림으로 남을 돕는 일이지 노예가 되는 일은 아니니까."
"결론은?"
"만약 내 정체가 까발려진다면 절필할거야. 오래된 생각이야."

나는 바로 과자 네 봉지를 사서 돈을 내고 부리나케 빠져나간다. 뒤에서 미애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래도 신경쓰여서 돌아보니 애가... 울고 있다. 두 발로 서서 정확히 나를 노려보는 채. 안구를 찔러도 피가 나왔으면 나왔지 눈물이 안나올 그 얼음공주가?

"바보... 마음대로 해!"

여자를 울린 상황에 죄악감이 들지만 그렇다고 돌아와서 다독여줄 생각도 없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저 입술을 곱씹으며 부실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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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주의 문체가 내 취향이다. 간결하면서도 툭툭 끊어지지 않는 게 매우 좋아. 글이 엄청 술술 읽히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내용이 어색한 것도 아니고 적절한 타이밍에 끊기는 것도 그렇다. 부러 질질 끌지 않는 것, 주인공이 이리저리 휘둘리듯 휘둘리지 않는 게 보는 입장에선 개운하다. :) 첫 화를 봤을 때 쓰려고 했던 말이지만, 혹여 첫 화만 올려놓고 사라질까 싶어 안 썼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올리는 걸 보니 적어도 꾸준히 쓰려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열심히 써 줘. 지켜보고 있어. 워낙 피드백을 잘 못 주는 편이라 응원하고 간다. 다음 편이 기대 돼.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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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맙다. 컨셉과 함께 그런 초심을 계속 유지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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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자마자 제일 눈에 띈 것이 수영 선배가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프라모델마냥 한 손에 잡히는 크기가 아니라 [기동전사 건톰즈]의 주역 기체 건톰즈의 1/60짜리 대형 건프라..

"어? 들어왔어? 딱 최대 4개정도 들어간다 싶더라. 거스름돈은 너 하렴."
"네에. 그럼 어디에 놓을까요?"
"그냥 탁상 위에 다 까면 되. 야 애들아 먹으면서 해라."

먹으면서 하라니 그림에 정말 안좋은 짓을... 하지만 뭐라고 따지기도 힘들다. 사실상 수영 선배가 제일 먼저 끝냈고 그림 또한 과연 내가 필요하냐 싶을 만큼 정교하기 때문이다. [신기동전기 건톰즈W]의 주인공 기체인 윙 건톰즈가 날개를 펴고 트윈 버스트 라이플을 난사하는 장면이다.

"사실 나 사람은 잘 못그려."

그런 것인가. 하긴, 자세히 보면 명암이라는게 아예 없다. 딱 청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네에. 명암만 잘 넣으면 어찌 될 것 같네요. 사람 그리는건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누굴 제일 먼저 그리고 싶어요?"
"으... 정말 많아서 고민되는데? 설마 그것까지 그리라는건 아닐테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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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따라 그리면 도움이 되요. 선배 건톰즈 좋아하잖아요. 그 애니에서 사람 나오는 명장면을 10장정도 그려보세요."
"인체비례같은 건 안 가르쳐주냐?"
"애니메이터가 저보다 10배로 잘 그리는 사람일껄요? 일단 사람 그리는데 어느정도 친숙해지면 가르쳐드릴거에요. 다른 분도 살짝 볼게요."

다음은 덕담 선배... 는 나도 놀라울 정도로 그림을 매우 잘 그린다. 대상은 [라이언 일병 굴리기]의 잭슨 상병. 솜씨는 사진을 그림으로 옳겨놓았다고 볼 정도로 펜선이 정확하고 명암이 리얼한데다 잭슨 상병의 주무기인 저격총까지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림 그리는 데 집중을 방해하선 안되니 조용히 지나가려고 하지만 가서 한마디.

"나 모에체 못 그려."
"...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저정도 그릴 줄 알면 저 필요 없을 듯 한데요. 저보다 훨씬"
"나 극화체밖에 못 그린다고 X발! 팔리는건 모에체라고. 내가 그리고 싶은 것도 그렇고. 에이 씨X."

덕담 선배는 손을 놓고 스마트폰으로 [월드 오브 땅끄]를 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뭔가 굉장히 벽에 막힌 듯한 사람 같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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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반진원... 은 원래 그놈의 그림을 잘 알고 있지. 뭐든지 대충이고 그래서 뭐든지 날림이다. 손바닥으로 놈의 뒷통수나 친다.

"아야!"
"X끼가 그렇게 날림으로 그리는 주제에 나에게 부탁했단 말이야? 니 선배나 본받아 새X야."
"아 이건 빅- 피쳐라고 임마. 일단 크게 스케치한 다음에 나머지를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다시 한번 뒷통수를 갈긴다.

"야!"
"스케치라는게 그렇게 굵은 선으로 빡빡 그리는 거냐? 너 그림 그리지 마. 줄 그어. 빈 페이지에 직선을 가로부터 세로까지 세밀하게 채우는거야. 자 대지 말고 니 맨손으로. 비뚤삐뚤하지 않을때까지 그린다."

선넣기는 것은 그림에서 가장 기본적인 스킬이다. 그림은 선으로 이어진 것이니까. 하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까진 없다. 그림은 근성이고 내가 녀석에게 시키는 짓은 근성을 주입하자는 짓이다.

"나 이거 3일동안 시킬꺼야. 내 앞에서 10장씩 알겠어?"
"으으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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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성과 김상재는 그냥 그림 안 그리던 놈이 잘 그릴 거라고 애쓰는 경우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거고, 좋게 말하자면 봐서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초딩 그림체다. 이들이 그리는 작품은 똑같다. [진괴담월희]라는 중2병 어반 판타지다. 일단 민성이부터 충고를 준다.

"좀 더 세밀하게 차근차근히 그릴 수 있어?"
"그건 좀..."
"빨리 그릴 필요 없어. 어차피 회지까지 시간은 남아 있잖아. 세밀하게 그리면서 솜씨가 늘면 시간도 빨라져."
"............ 알겠어."
"혹시나 잘 안되면 그림을 밑에 깔고 선을 뜨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생긴건 멀쩡한데 역시 분위기 그대로인 놈인지 말수도 적고 어눌하다.

"상재 너도 마찬가지."
"하아? 지금 나의 살인기예를 놓고 논한다 이 말이냐? 내가 이걸 그리는데 초감각을 투기에 실어서 그리고 있거늘."
"그게 잘도 팔리겠냐. 너도 진원이처럼 할래? 다시 그려봐."
"저주받을."

상재는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중2병이라 자존심이 있는 놈인지 눈을 치켜뜨고 펜선에 힘을 주어서 그리고 있다. 이런 버릇 꽤 안좋긴 하지만 초짜니까 따질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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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비에 유재훈은... 이런 미친! 지금 사람이나 그걸 그리지 않고 가슴만 쭉 그리고 있다. 빈유 가슴, 근육 가슴, 커다란 젖탱이, 더 커다란 젖탱이. 유두까지 세밀하게 그리는 꼬라지를 보니 아주 가슴에 환장한 놈 같다.

"얼굴은 안 그려?"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면서? 내가 가장 그리고 싶어하는 건 가슴이라구. 그 다음엔 엉덩이. 그 다음엔 허리."
"그럼 얼굴도 그려봐. 누드라도 상관없으니까."

질린다. 이 녀석이 최악의 변태라는건 익히 알고 있지만 이정도라면 사실 답이 없는게 아닐까 싶다. 한규식도 마찬가지인 수준인데 이 녀석은 재훈이보단 간략하게 그리는 것 같은데 전부 여캐 하반신이다. 게다가 하반신에 뭘 꽃는거냐?

"성행위라는건 하반신만 있으면 되요. 유재훈 선배는 그걸 모른다니까요."
"너 꾸금지 그릴 생각이냐?"
"어차피 동인지라는게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답도 없는 후배다. 일단 나체를 그리는 건 기본기를 쌓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니 별로 탓하고 싶지 않다. 그래고 마지막으로 백현태는... 동물을 그리고 있는데 매우매우 귀엽다! 그림 실력은 차치하더라도 마치 동심에 가득 찬 느낌이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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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저 잘 그리고 있는 거 맞죠?"
"되도록이면 사람도 그려봐. 서양 쪽을 참고하면 좋을거야. [노스파크]라던가 [스노피]라던가 아니면 [무만트롤]이라던가."

이 말밖에 해줄 생각이 없다. 사실 조형은 귀엽게 잘 그리고 있고 이런 동화같은 그림체는 인체비례따윈 상관이 적으니까. 하지만 이게 코믹왈도에 잘 팔리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동인계는 초중딩 학예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동화같은 그림체라 하더라도 위에 언급한 것보단 훨씬 딸린다. 하지만 그의 개성을 죽일 생각은 없다. 어쩌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녀석은 백현태 이 녀석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림 그리기만 시켜서 3시간이 넘어서야 귀가한다. 그동안 나도 그림을 안 그리는 게 아니다. 그림체는 버릇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자유자재로 그림체를 바꿀 수 없지만 나도 3가지 그림체가 있으며 그 중에 하나를 변형시켜 시범을 보였다. 본래 BL그릴 때 쓰던 그림체에서 좀 더 남성향적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엑셀 부원에게 존잘 소리 듣긴 충분하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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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그림을 그린다. BL그릴때 쓰던 여성향적인 그림체, 미술과 비슷한 사실적인 그림, 그리고 SD. 하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드는 생각이 있다면 어느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원래 미술이야 사실을 보고 그리는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는 딱 누군가를 빼닮아버린 화풍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표절이라고 할만한 그림체며 좋게 말해봤자 여자들에게 팔릴 만한 그림체를 판에 박힌 듯이 양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찍이 누나가 그림밖에 못 그리는 바보는 결코 만화가가 되지 못한다고 했던가. 지금 내가 딱 그런 꼴이다. 사실 엑셀에서 이들의 그림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바로 열등감이다. 퀄리티는 차치하더라도 각기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그 반대이지 않을까. 아니, 다르다. 오래전에 느꼈던 바가 있다. 바로 내가 가지고 싶은 화풍을 아직도 못 찾고 있다.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여성향식 화풍을 '잘' 그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림으로 누굴 돕는다라는 내 꿈을 이루기엔 부족한 것 같다.

굳이 남성에게 먹힐 그림을 찾을 필요까진 아니다. 대체 내가 그리고 싶은건 무엇이었을까라는 거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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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리던 손을 놓고 창문을 연다. 창문에 펼쳐진 풍경은 언제나 봐도 새롭기 때문에 계속 풍경화를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석양이 지는 풍경부터 다른쪽 창문까지 열어서 몇시간이나 다양한 풍경들을 쭉 그린다. 아주 세밀하게. 놓친 부분까지 찾아보면서. 그러다보니 느낀 점은 뿌듯함이라던가 뭔가 부족함이라던가 그런게 아니라 술냄새다. 뒤에서 누나가 술에 쩔어 있는 채 어기적 걸어가고 있다.

"으 술냄새. 얼마나 마신거야?"
"흐에에에에~ 딱 10잔 밖에 안 마셨어. 칵테일 10잔."

자랑이다. 일단 흐느적거리던 누나를 부축하고 침대에 눕힌다. 하지만 술에 막 취했는데도 장난기가 돌았는지 티셔츠의 앞섶을 슬쩍 끌어서 깊은 가슴골을 보여주고 한 마디.

"이렇게 해도 근친은 다메에에에~ 막 이래 에헤헤헤헤헤."
"누가 따먹을까보냐. 조용히 잠이나 자. 그렇게 취한 걸 보니 대박 났었겠네. 누나는 기뻐야 술 마시는 타입이니까."
"오~ 그렇지이이? 그게~ 아침부터 200부가 완매되었지 뭐야~ 그걸 대비해서 어제 미리 출판소에 부탁해서어어~ 오늘 점심때 200부 받았는데 또 다 팔리고~ 오늘 주은미 씨 젯~코~죠! 아니겠냐. 히히히히."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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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팔렸으면 정말 기분이 HIGH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긴 이번에 내놓은 신간은 수위가 엄청 센건 말할 것도 없고 누나가 엄청나게 신경써서 쓴 것이니까. 보통 회지가 팔리는데 잘팔려봤자 200권 정도인 걸 감안하면 이건 정말로 센 것이다. 그런데 누나의 손이 빈손인 걸 본다면 아무래도 말했던 것보다 훨씬 잘 팔렸던 모양이다.

"그냥 쉬어. 쭉 자고. 안 자겠다고 그러면 숙취 때문에 고생할 것 같으니까."
"에헤헤헤... 그래도 누나 가지고 딸치면 안~돼."
"칠까보냐! 돈 만원 가져갈게."

그냥 게임이나 하자. 누나는 가면 갈수록 사람 약올리는 솜씨만 늘어나는 것 같다. 결국 이번 밤은 게임방에서 서너시간 보내다가 집에 들어와서 내 침대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끝난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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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일요일.

"우~웅... 상열아. 아침밥은?"
"한시 다 되어가는데 무슨 아침밥을 먹어. 상 차려 놨으니까 먹자."

대화는 점심이 되어서야 시작된다. 사실 깨어나기는 아침에 깨어난 듯 싶지만 이놈의 숙취가 그런지 이불에서 온몸을 비비다가 이때 와서 제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 결코 저런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지. 여튼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전할 차례인 듯 하다. 같이 밥 먹는 상황이 가장 이야기가 유하게 전달되는 때니까.

자초지롱을 설명하고, 결론은 누나 도와줄 시간이 조금 깎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양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누나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해진다. 어쩔 땐 미애에 대해 욕을 하기도 하고, 그의 언니인 미선에 대한 뒷담도 푼다.

"자매가 아주 쌍으로 리버스 팔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런 차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던 좋아. 이 누나는 매우매우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통보 안해도 사랑스러운 남동생을 다 이해한단다. 물론 시킬 일은 시키겠지만?"

평소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평소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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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일에 지장이 생길 수가 있어. 정말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네 친구들의 일로 내 일을 쉬어도 좋다고 봐.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니까. 게다가."

누나는 자신의 명치에 손을 대고 한마디 한다.

"이 생명은 사실상 네가 준 것이니까. 무얼 하든 네 뜻에 따를거야. 난 네가 만화가가 되는걸 바라지 존잘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니까."
"누나..."

괜한 걱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나를 동인계에 끌어들여서 BL을 그리라고 시킨 이유는 순전히 누나 주은미 자신의 열정인 것도 있지만, 내가 만화가가 되는 꿈을 이루고 싶은 게 누나의 꿈 중 하나인 것도 있으니까. 순간 뭉클했다. 하지만 그 흥분은 3초만에 식어버린다.

"게다가 그 리버스 파는 X년을 꺾어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너. 내기 지면 앞으로 널 여장시켜서 부스에 세워놓을테니까 그렇게들 알어."

그럼 그렇지. 내가 누나에게 이상을 바라는게 바보다.


================================ 다음 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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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주인공 주상열의 외모에 대한 컨셉은 아직도 정하지 않았다.
평범한 외모라고 하면 너무 진부해지니까 뭔가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적절한 요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여튼 질문 받을게. 다른 충고나 비판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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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텀이 길었지만 다음 화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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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 되어서 일찍 일어나보니 누나는 푹 자고 있다. 어차피 주일이고 숙취 때문에 건드릴 것도 아니다. 왜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고 한다면 나는 성당에 다니기 때문이다.1학년때 봉사활동으로 벽에 그림을 그렸던 그 성당.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서 미사를 드리고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성상에 기도를 하는게 주일의 일상이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크리스천이라고 의식하진 않는다. 그저 신에게 기도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뿐이다. 오늘 드린 기도는 '부디 이번 한 주 조용하고 원활하게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라는 것이다. 매번 그래왔던 기도다. 어제 굵직한 사건을 겪고 나서 그러기는 그른 일이지만 그래도 천원짜리 한장 놓고 이렇게 기도를 드리면 마음이 풀린다.

"제법 신실한 신자가 다 되었어. 주상열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강운장. 내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다. 그리고 내 정체를 아는 사람 중에 한명이다. 누나의 5년째 남친인 코스플레이어. 지금은 군대를 앞두고 있는 몸이다.

"보나마나 이번 주에도 잘 지나가게 해주세요. 라겠지."
"알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내지 마. 운장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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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냑 오래 지내고 만나는 사이라 그냥 말 까고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운장이 형이 주상열이란 인간의 정체를 아는 만큼, 나도 강운장이란 인간은 속속히 알고 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속내를 알 수 없어서 꺼림칙한 인간. 그리고 절대 바보가 아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면서 나에게 한마디 묻는다.

"아까 문자로 은미에게 들었다. 남자애들 그림 그리는거 도와주기로 했다며?"
"뭐... 그렇게 되긴 했어."
"거기서 네 그림은 안그릴거냐?"
"절대. 네버. 그림만 가르칠꺼야. 회지는 쉴지 모르겠지만."
"겁쟁이구만. 최미애에게 책을 잡힌 것 때문에 그래? 아니지...."

운장이 형은 실눈으로 나를 자세히 관찰한다. 마치 내 몸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것이 불쾌하지 않다면 성인에 가깝다. 그 실눈 안으로 그윽한 눈빛을 쏘아낼때 손찌검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들까. 하지만 그 사람은 강한 인간이란건 알고 있기에 주먹도 쥘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겁쟁인 것인가. 하지만 대답은 다르다.

"솔직히 남자가 BL그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네가 그리고 싶은게 뭔지 아직도 모르는게 무서울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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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측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전자는 나에겐 큰 일이라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다. 하지만 후자는 다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그리고 싶은게 무엇인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항상 고민하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림 밖에 못 그리는 바보'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다.

"너무 무리하지 마.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언젠가 나오게 되어 있을테니까. 그리스도께서 영감을 팍팍 불어넣지 않겠냐."
"아까 진지하게 말해놓고 이렇게 개드립을 치는 건 뭐야?"
"그냥 개드립이 아니지. 널 아름드림에서 빼겠다는 말까지 했으니까. 아무래도 네 누나는 너에게 시간을 주고 싶은 모양이다. 니가 진짜 뭘 그리고 싶은지 쉬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지."
"에효.. 시덥잖은 이야기잖아. 무슨 [바카라몬]인줄 알아? 자신만의 서체를 찾기 위한 주인공처럼, 내가 섬까지 가서 애들이랑 놀기까지 해줘야 하나? 그렇게까지 안해도 될 일이야."
"그까지 할 여력이 있겠냐. 그리고 시덥잖은 이야기가 아니지."

운장이 형은 한마디 더 쏘아붙인다.

"솔직히 BL이라는 장르.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잖아. 네 누나를 돕기 위해서 그릴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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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BL이라는 것은 좋아할만한 것이 아니다. 여자가 남성향 뽕빨물을 좋아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는 것처럼, 남자가 남자끼리 애정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다. 나의 입장에서 BL을 향한 감정은 혐오까진 아니다. 이해는 한다. 남덕만 하더래도 여캐들이 잔득 있는 꽃밭을 좋아하는 경우가 무척 많으니까. 이를 변환하면 BL이 되는 것 정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정을 붙일 만한 게 아니다. 나는 그저 누나를 돕기 위하여 '아름드림'의 '드림'이라는 필명으로 수많은 BL을 그릴 뿐이다.

"그럼 대체 뭘 그리라는거야?"
"그걸 네가 찾아봐야지. 은미의 스토리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네 스토리와 네 기호에 맞춰서 네 욕망껏 그리는 걸 보고 싶다는 의미야. 좋아하는 건 있을 거 아니야?"

생각해보니.... 아무리 애니와 만화를 쭉 봤다고 해도 딱히 인상에 남는건... 그림뿐이다.

"그다지. 난 그림만 보니까."
"있어. 찾다보면 말이다. 스스로를 살펴봐. 나는 그 결과물을 보고 싶다."

운장이 형은 담배재를 끄고 천천히 지나가면서 마지막 한마디 던진다.

"네 누나도 그걸 원하고 있고."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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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지막 한마디에 나는 일어서서 대답한다.

"그럼 회지에 직접 내 그림을 넣어서 내 정체를 까발리라는 소리야?!"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한마디 더 해줄게. 넌 그림 그리는 기계가 아니야. 민우가 했던 말처럼."
"...정민우."

운장이 형은 '그럼 짜이찌엔.'이라는 말만 꺼내고 주차장으로 간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입에서 불쾌한 인명이 나오는 말에 꺼림칙함을 무시할 수가 없다.

정민우. 운장이 형과 똑같은 코스플레이어다. 그리고 내 단짝이었던 놈이다. 그리고, 지금은 말 한마디 꺼내지도 않는 사이다. 1학년이 되고, 내가 첫 BL 꾸금지를 그렸던 걸 운장이 형에게 들었는지 당장 따진 일로 싸움까지 났으니까.

그의 분노가 아직도 기억난다.

'매일 남을 위한 그림을 그리잖아. 정작 너를 위한 그림은 없는거야? 넌 그 자체로도 좋은거야? 단지 누군가의 미소를 보는 기쁨으로? 네가 정말로 원하는 만화는 없는거야? 네가 무슨 기계야? 정작 네 취향은 없어? 뒤돌아서 생각해봐. 네 주위에 모두가 너를 이용하고 있어. 남의 말만 듣고 똑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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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남자가 BL그릴 수도 있고, 누나를 돕는게 무엇이 나쁜건지 모른다. 지금도 그렇다. BL은 절대 나쁜 장르가 아니며, 오히려 이를 남자가 그리는 데 반감이 드는 건 편견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내 스스로 누나를 돕기 위해 원한 일이다. 하지만 내 자신만의 작품을 찾기 시작하려는 계기는 그놈이다. 눈이 뜨인 것이다. 주변에서 내 그림을 보면서 자신만의 '존잘'로 남아달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최미애처럼.

확실한 것은 그거다. 나는... 존잘에서 그치고 싶지 않다고.

ㅡ부우우웅.

폰이 진동해서 꺼내보니 누나의 문자다. '올때 아이스크림 좀 사놔. 5000원치. 돈은 오고 나서 줄게.'

"나 참... 술 더럽게 쎈 여자네."

보통이라면 술기운에 지금도 뻗어 있어야 정상일텐데 운장이 형에게 내 일을 연락으로 말한 것도 그렇고 그럴 만한 기운이 있는 것인가? 어차피 새 화구도 사야 하니까 천천히 상가로 발걸음을 옳긴다. 어차피 아이스크림이야 동네 슈퍼에서 사면 되니 문구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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